[비마이너] 장애인시설에 있던 아들이 죽어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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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ㅎ장애인시설 의문사, 피해자 아버지 인터뷰
"내 자식 죽음 밝히는 게 이렇게 어렵나" 사망 40일...장례 못 치러 - 2015.03.06 04:03 입력 | 2015.03.06 13:00 수정
이명학(54세, 가명) 씨는 지난 1월 28일 아들을 잃었다. 아들이 온몸에 피멍투성이로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 온 지 35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의 아들 이우준(당시 28세, 가명) 씨는 지적장애 1급에 뇌병변장애, 선천성 희귀난치성 질환인 결절성 경화증이 있는 중증장애인이었다. 4년 전, 아버지는 중증장애인인 아들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그 삶의 무게에 떠밀려 아들을 결국 인천의 한 장애인거주시설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4년 만에 피멍투성이가 되어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 ▲지난해 12월 25일, 의식불명의 상태로 온몸에 피멍이 든 인천의 ㅎ장애인시설 거주인이 병원으로 긴급히 실려 왔다. 그는 입원 35일 만에 끝내 숨졌다. 시설 측은 넘어져서 생긴 상처라고 해명했다. |
성인 된 아들, 홀로 돌볼 수 없어 시설로… “방법이 없었다”
우준은 태어나자마자 어미 없이 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일용직으로 수입이 일정치 않은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지방을 돌며 바삐 돈을 벌러 다녔다. 할머니는 우준을 그 어떤 손주보다 애틋이 여겼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할머니가 키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팔순이 넘은 노모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그리고 2010년, 할머니가 다리 부상으로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우준은 할머니에게서 떨어져 아버지와 잠시 생활하게 됐다.
중증의 지적장애가 있는 우준은 24시간 누군가의 보호와 지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버지가 우준의 곁에 종일 머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중증장애인의 일상생활을 지원해주는 활동보조서비스를 알아봤다. 하지만 구청 직원으로부터 “된다는 보장도 없고 신청해도 한참 걸린다. 많이 이용해봤자 하루 네 시간 정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란 답을 들었다. 고작 네 시간이라니. 하루 8시간 일한다고 쳐도 최소 10시간~12시간은 나 대신 누군가 우준을 돌봐줘야 하는데. 아버지는 막막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시설에 관해 이야기했다. "애 때문에 일도 못 하고 이렇게 살 거냐. 할머니도 편찮은 마당에 아비 혼자 끌어안고 살 순 없지 않으냐. 여러 사람 위해서라도 시설을 알아봐라."
그래서 아버지는 인천에 있는 장애인거주시설 십여 군데를 알아보러 다녔다. 하지만 시설은 이미 많은 장애인들로 포화상태였다. 우준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그러던 중 그해 신설한 인천 ㅎ시설을 구청을 통해 알게 됐다. 시설을 찾아갔다. 시설 관계자로부터 시설 이용인의 하루, 일주일, 한 달 프로그램 일정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을 들었다. 체계적인 교육시스템을 갖춘 곳 같았다. 후엔 시설을 나가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사회적응훈련도 도와준다는 이야길 듣고 믿음이 갔다.
세 번째 방문하던 날, 아들을 이곳에 보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마음 편히 정한 것은 아니었다. 시설밖에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이런 곳에 보내고 싶었겠어요. 그런 부모는 한 명도 없을 거예요.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활동보조인? 신청도 못 해봤어요. 등급 재심사도 한참 걸리고, 신청해봤자 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때 활동보조인 있었으면 시설에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선택한 건데 결과가 이렇게 되니… 뭐라 말할 수가 없죠.”
선택. 그는 선택이라 했다. 그런데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자녀를 시설에 보내지 않는 것? 학교를 졸업해 더는 갈 곳 없는 스무 살 넘은 장애인 자녀를 24시간 돌봐야 하는 삶. 그 삶만이 다른 선택지로서 그 앞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우준을 시설에 보내고 얼마 후 할머니가 퇴원했다. 노모는 우준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려 했다. 하지만 치매 있는 쇠약한 노모가 아들을 돌보기엔 무리였다. 그렇게 한참의 실랑이가 오갔다. 그러나 데려올 순 없었다.
아버지와 노모는 종종 면회를 갔다. 하지만 일이 바빠지면서 2011년 이후엔 잘 찾아가지 못했다. 대신 그의 형제들, 우준의 고모와 큰형님네가 우준을 만나러 갔다. 마지막 면회가 지난해 8월 말이었다. 우준에 대한 네 번의 병원 진료 기록 중 최초의 것인 9월 보다 한 달 앞선 때였다.
"넘어져서 다쳤다는 말, 믿을 수 없어"
진료 기록에 따르면, 지난해 9월 21일 우준은 철제 위로 넘어져 상처를 입었다. 다음 날인 22일, 시설 관계자는 시설에서 4km 남짓 떨어진 Y의원에 그를 데려간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그의 왼쪽 눈은 부종이 심해 안 떠질 정도였으며 ‘상세불명의 결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우준이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오기 나흘 전인 12월 21일, 그는 오른쪽 하퇴부와 발목, 오른쪽 눈 주위가 멍들고 부어 또 다시 Y의원에 방문한다. Y의원 차트엔 전날 넘어지면서 상처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날은 다리 엑스레이만 찍었다. 당시 그를 진료했던 의사는 그가 계속 머리를 움직여 머리 엑스레이는 찍지 못했다고 했다.
9월과 12월 사이인 11월 2일에도 우준은 시설 관계자와 의원에 왔었다. 당시 그는 오른쪽 귀가 찢어졌다. 이어 18일엔 지난 2일에 찢어져서 봉합한 오른쪽 귀의 상처가 전날 다시 터져 재봉합을 위해 의원에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시설에 있던 지난 4년여의 시간 동안 우준이 병원 진료를 받은 것은 이 네 번의 기록뿐이다.
의원 마지막 방문 날로부터 나흘 후인 12월 25일, 우준은 오른쪽 눈, 겨드랑이, 허벅지, 발목 등 신체 곳곳에 피멍이 든 채로 의식을 잃고 경기도 시흥의 S병원에 후송된다. S병원은 시설 지정 병원이다. 그는 경막하출혈(뇌를 둘러싼 경막 안에서 외부 충격 등으로 혈관이 파열돼 출혈이 일어난 상태), 저산소성 뇌 손상 등으로 뇌사상태에 빠진 상태였다. 키 171cm에 몸무게 39kg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 ▲피멍이 든 오른쪽 눈(왼쪽). 뒤통수는 크게 부어 혹이 생긴 채 상처에선 일주일가량 출혈이 지속됐다(오른쪽). |
시설 측은 우준의 상처가 넘어져서 생긴 거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넘어지면 이렇게 된단 말인가. 우준의 아버지 이명학 씨가 생각했을 땐 아무리 사람이 넘어져도 이렇게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시설 내부에서 폭행이 있었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닿았다. 그날 새벽, 경찰에 폭행 혐의로 시설을 신고했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 진정을 냈다. 이어 관할 군청에, 인천시에 폭행 의혹에 대해 진정서를 제출했다. 관할 경찰서 앞에서 서장 면담을 촉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검찰에도 진정서를 냈다. 하지만 군청과 인천시는 경찰 수사 결과가 나와야만 행정처분을 할 수 있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생계도 제쳐놓고 아버지 혼자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사이, 지난 1월 28일 아들은 끝내 숨졌다. 뇌사 상태에 빠진 지 35일 만에. 아버지는 부검을 요청했다. 부검 결과 사망원인은 경막하출혈로 이전에도 경미한 경막하출혈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신장암 등 질환도 발견됐으나 사인과의 직접적 연관은 없었다. 그리고 몸에 난 멍들은 부검으로는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통보도 받았다. 결국 이는 경찰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그러는 사이 시설 측의 진술은 조금씩 바뀌었다. 우준의 혈소판 수치가 낮게 나오자, 시설은 혈소판 수치가 낮아 멍이 잘 들었다고 했다. 또한 우준이 자해와 타해를 하던 거주인이라고도 했다. (경인방송 2월 3일, ‘상쾌한 아침 원기범입니다’ 시설 관계자 인터뷰)
그러나 입소 당시 우준을 초기 면접했던 사무국장 A 씨는 그를 ‘얌전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시설에서 생활재활교사로부터 생활 보고를 받고 이를 감독하는 업무를 했던 A 씨는 최근 이명학 씨와의 통화에서 “자해가 심한 친구가 아니었다. 손바닥을 조금 입으로 깨물고 눈에 손을 대는 정도였다. 나쁜 건 없었다. 자해가 심하면 생활교사가 보고했을 것이다.”라고 그를 기억했다.
또한 시설은 그가 질환을 알리지 않고 입소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입소 당시 장애인 등록증, 건강진단서, 복지카드 등은 입소를 위한 기본 서류 중 하나였다. A 씨 또한 “1, 2급 중증만 들어올 수 있는 시설로 그러한 서류가 없으면 못 들어온다. 내가 입소 받았지 않았느냐.”라고 답했다.
“내 자식 죽음 밝히는 게 이렇게 어렵나” 사망 40일 되도록 장례 못 치러
진실은 무엇일까. 그는 어떻게 하여 이토록 온몸에 피멍이 들고 죽음에 이르렀을까. 자해, 타해가 심한 이였다면 지난해 8월 말, 그의 친척이 면회 갔을 때 시설은 왜 알리지 않았을까. 과거에도 경막하출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그를 책임지고 보호해야 할 시설은 무엇을 했을까.
아버지는 끊임없는 물음이 들었다. '이것은 시설의 방임·방치 아닌가?' 이명학 씨는 이에 대해 경찰에 재차 물으며 엄정한 수사를 촉구했지만 경찰 수사는 여전히 미온적이다. 경찰은 CCTV 분석을 하고 있다지만 시설 CCTV는 엘리베이터 앞, 복도에만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 사이, 아들이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후송된 날로부터 두 달이 훌쩍 지났다. 이 사건을 알게 된 지역 장애인단체와 만나면서 꾸려진 ‘인천 ㅎ 장애인거주시설 이용인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와 함께 한 달을 싸워나갔다. 하지만 아직 속 시원히 밝혀진 진실은 없다. 상황이 이러니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다.
![]() ▲이명학(가명) 씨가 아들 진료 기록이 담긴 네 개의 진단서를 펼쳐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
“마음도, 몸도 온전하게 편한 데가 없어요. 혼자 있을 땐 관계기관만 두드렸는데 대책위와 함께하니 복지부 같은 보다 근본적인 곳, 더 큰 데를 두드리게 돼요.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고. 이 현실을 어떻게 하는 게 옳을지 헷갈릴 만큼 너무 힘들어요. 언제까지 내 새끼를 냉동고에 놔둬야 하나. 거기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과거, 그에게 시설은 ‘보호자가 환경에 따라 같이 있지 못하면 언제든 위탁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언제든 데려올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합법을 위장한 죽음의 시설이에요. 4년간 얘한테만 이런 사고가 있었을까, 물음이 들어요. 보호자가 있는데도 관계 기관마다 덮기 바빠요. 전엔 전혀 상상 못 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시설 자체가 이런 곳이에요.”
대책위는 복지부가 직접 나서 거주인 학대·방임 의혹에 대한 진실 규명과 시설 내 인권침해실태를 조사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경찰 수사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길이 쉽지 않다.
“안갯속 장막에 덮여있는 거 같아요. 잠깐 안개만 걷히면 투명하게 보일 텐데 이게 안 걷히는 거예요. 걷힐 생각도 안 해. 그 현실이 참 답답하죠. 내가 여태 이런 나라에서 살았나. 잘은 못 살았어도 나라가 시키는 대로 살았어요. 그런데 내 자식 죽음에 대해 진상 밝히는 게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지, 그게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요. 내가 이 나라에 사는 거 맞냐고. 끝이 어딘지도 물어보고 싶어요, 끝이 어딘지.”
오는 17일이면 우준의 49재다. 그의 혼이 아직 구천에 떠돌고 있다. 노모에겐 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이 죽음의 ‘진실’은 무엇인가? 자식을 잃은 부모가 여전히 되묻고 있는 질문이다. 지금, 이에 답하고 넋을 달래주어야 할 이들은 어디서 무얼 하시는가.
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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