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 취지·내용 유명무실하게 위법”…장애인 원고에게 위자료 지급 주문
장애인 접근권, ‘헌법상 기본권’ 첫 판시… 장애계 “중대한 이정표 될 것”

‘1층이 있는 삶’을 향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외침에, 대법원이 마침내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특히, 대법원이 장애인 접근권이 ‘헌법상 기본권’이라고 최초로 판시하며, 접근권 보장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1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장애인 접근권 관련 국가배상’ 사건에 대해, 원심의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파기·자판하고 장애인 당사자 원고 2명에게 각 10만 원의 위자료를 인정했다.

이날 대법원은 소규모 공중이용시설의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한 시행령을, 24년 넘게 개정하지 않은 것을 행정입법부작위로 판단했다. 이를 국가배상법에 따른 고의·과실로 보고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됐다. 

소송에 나선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이하 장추련)는, 장애인 등 모두가 공중이용시설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길 바라며 정부를 상대로 오랜 법정 다툼을 이어왔다.

장기간 국가가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의 소규모 공중이용시설의 편의시설 설치 범위 규정을 개정하지 않아, 장애인 접근권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취지다.

6년에 걸친 소송 과정을 통해, 대법원은 오랜 기간 장애인 접근권을 유명무실한 정부의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장추련은 “그동안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은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식당의 문을 두드려도,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대법원에 판결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법원이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이 오히려 접근권을 침해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라며 “이번 판결을 통해 더 이상 위헌적인 시행령을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정부의 각성을 촉구했다.

19일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현장. 이날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장애인 접근권 관련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환영의 뜻을 표했다.
19일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현장. 이날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장애인 접근권 관련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환영의 뜻을 표했다.

장기간 개정하지 않은 시행령… 정부의 ‘고의·과실’ 인정돼

이번 소송의 쟁점은 크게 ‘이 사건에서 행정입법부작위가 위법한지’, ‘위법하다면 그로 인한 국가배상책임이 성립하는지’ 총 2가지였다. 

먼저, 해당 개정안을 장기간 개정하지 않은 것이, 법률을 제정해야 할 의무를 시행하지 않았다는 ‘행정입법부작위의 위법성’ 판단 여부다.

지난 1998년 장애인등편의법이 제정되면서 편의시설 의무설치 범위를 대통령령인 시행령에 위임했다. 당시 바닥면적 300㎡ 이상인 공중이용시설에 한해서만 설치 의무를 부과했다.

그 결과, 2019년 기준 전국 편의점 중 약 98%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에서 면제됐다는 것이 장애계의 설명이다. 대부분의 소규모 공중이용시설이 대상 시설에서 제외됐다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소규모 공중이용시설에 대해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제한하던 구 시행령 규정은, 지난 2022년 바닥면적 기준이 300㎡ 이상에서 50㎡ 이상으로 개정되기 전까지 약 24년간 유지됐다.

해당 사안에 대해 대법원은 “이 사건 쟁점 규정은 대부분의 소규모 공중이용시설에 대해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하고 있는데, 해당 규정이 시행된 후 24년 넘게 개정하지 않은 행정입법부작위는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장애인 접근권을 유명무실하게 위법한다.”고 봤다.

대법원 판결에 기쁨을 표하고 있는 기자회견 참가자들.
대법원 판결에 기쁨을 표하고 있는 기자회견 참가자들.

대법원 “국가배상책임 성립”… 장애인 원고들에게 ‘위자료 지급’ 주문

국가배상책임 성립 여부에 대한 판단도 이어졌다.

대법원에 따르면,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기 성립하기 위해서는 공무원의 직무 수행이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

대법원은 ‘쟁점 규정은 대부분의 소규모 소매점을 편의시설 설치 의무 대상 시설에서 제외함으로써, 장애인등편의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입법 취지·내용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봤다.

즉, 장기간 개정하지 않은 시행령으로 인해 입법 취지와 내용이 장기간 실현되지 못했고, 그 불이익 정도가 커서 부작위가 위법하다는 설명이다.

이어 ‘피고의 부작위는 행정입법을 통해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대상 시설의 범위를 정하도록 재량을 부여한 장애인등편의법, 장애인차별금지법 취지와 목적에서 현저히 벗어나 합리성을 잃어, 사회적 타당성이 없는 행위로서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했다’며 국가배상법 제2조1항이 정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에 위반’한 행위로 판단했다.

이에 대법원은 행정입법의 위법한 불이행으로 인한 위자료 청구 등의 특성을 고려, 장애인 당사자 원고들에 대해 위자료 10만 원씩을 지급할 것을 주문했다.

사단법인 두루 한상원 변호사(오른쪽)가 판결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사단법인 두루 한상원 변호사(오른쪽)가 판결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장애계 “대법 판결, 장애 인권의 중대한 이정표”

이번 판결에 대해 장애계는 환영의 뜻을 표했다. 오랜 시간 바래왔던 1층이 있는 삶이, 대법원 판결을 통해 한층 다가왔다는 기대다.

소송 대리인을 맡은 사단법인 두루 한상원 변호사는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는 시행령을 제정하고, 24년간 방치한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던 상황.”이라며 “이 같은 상황에서,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장애 인권에 있어서 중대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이번 판결은 단순히 국가의 배상책임만을 확인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제도적 차별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심판을 내린 것.”이라며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공중이용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의 개정을 요청했다.

대법정에서 함께 재판 결과를 확인한 장추련 박김영희 상임대표는, 길었던 투쟁의 역사를 회상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박 상임대표는 “판결문을 한 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래 전 돌아가신 고 김순석 열사의 가슴 속 맺혔던 한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게 됐다.”며 “이번 결과는 모두가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이번 판결로 시행령이 개정되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대로 이행될 수 있도록 해야 된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 것.”이라며 “접근권이 당당하게 권리로써 보장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앞으로의 의지를 다졌다.

재판 결과를 확인하고 나온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김영희 상임대표.
재판 결과를 확인하고 나온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김영희 상임대표.

“소규모 점포도 편의시설 설치 의무화”…  ‘1층이 있는 삶’ 향한 오랜 호소

한편, 그동안 장애계는 바닥면적과 상관없이 경사로 등의 편의시설 설치를 의무화해, 모두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을 호소해 왔다.

이후 2018년 4월. 장애계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 당사자 등을 원고로 장애인 접근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사업주(GS리테일·호텔신라·투썸플레이스)와 대한민국을 피고로 하는 소송을 제기하며 긴 싸움을 시작했다.

소송 과정에서 1심 재판부와 항소심 재판부는 사업주의 책임을 인정, 편의점과 카페 등 소규모 공중이용시설에도 편의시설을 설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국가의 책임은 묻기 어렵다는 결정을 내렸다. 국가가 장기간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위법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고의·과실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려워 국가배상책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이에 장애계는 다시 상고심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전원합의체 공개변론까지 이어지는 오랜 공방 끝에 19일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